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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가 부푸는게 두려워서 I

데즈리 2017. 8. 6. 13:09






아무것도 되는게 없었다. 티켓을 받고 나서부터 계속 그랬다. 무슨 금단현상처럼 손이 달달떨려서 결국 커피를 타다 손이 미끄러져 반은 엎었다. 아. 아끼던 책에 갈색 얼룩이 덕지덕지 생겨버렸다.  눈가를 꾹꾹 누르며 얼룩을 대충 수건으로 덮었다. 시발놈...... 



여제껏 두달이다. 두달이나 지났다. 뭐하고 사는지 몰랐다고 하고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친구끊기 버튼을 누를까 몇백번 망설이는 사이 근황도 올라오고 밴드 인스타도 업데이트되고 그렇게 두달이 지난 것 뿐이라고, 선호는 생각했다. 일단 관린의 밴드 노래는 좋았으니까. 뭐 나쁘게 헤어진것도 아니니까. 이정도는 뭐어때. 일단락 친구로써. "이별 후 쿨병"이어도 상관 없었다. 애초에 선호는 이 이별을 "쿨하다고" 생각중이었다.  



근데 그게 실수였다. 유유부단한 관린은 몰라도, 속이 좁아터진 유선호는 그게 안되는 인간이었다. 입이 귀까지 걸린 관린의 모습이 페북탐라에 뜰때, 심지어 사진 아래에 어디서 만난 사람들인지 관린에게 잘생겼다 좋아한다 어쩔때. 그 댓글에 달린 관린의 리리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 황급히 스크롤을 내리는,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자신이 싫었다. 



관린의 밴드가 곧 공연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선호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 홍대 공연장이었다. 관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던 시절보다 훨씬 메이저가 된 밴드는 이제 준프로급 공연에 빈번히 초대되고 있었다. 잘됬다고 생각했다. 사귈때도 저보다 더 오래 끼고있던게 베이스였으니까. 언젠가 선호한테 노래 만들어줄꺼야, 하며 화성학 공부 노트를 보여주었던. 아니, 이거는 역시 생각하지 않는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밴드 티켓이 선호 앞으로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친히 전남친분께서 손수 배달마저 해주셨다고 한다. 일단 우표가 붙혀있지도 않았고, 선호의 연애사를 아는 유일무이(아니다.)한 인간 민현이 형이 너 걔랑 재결합했냐고 물어봤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아까 걔랑 로비에서 마주쳤다고 했다. 그때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지금보니 이걸 전달해주려 그랬나보구나, 싶었다. 여전히, 정말 꾸준히 다정한 인간이였다. 



봉투에는 티켓과 함께 짧은 메세지가 동봉되어있었다. 찣어진 오선지 위에 관린의 초등학생같은 악필이 눈에 띄었다.


오고싶으면 와


문장 뒤로는 고민하다 끝내 잉크로 덮어버린 단어가 있었다. 엉성한 까만 소용돌이 사이로 보이는, 근데 보고싶다 라는 단어가.



갑자기 볼위로 뜨듯한게 흘렀다. 아 유선호 진짜 존나 찌질하다!! 존나!! 눈물이 턱에도 닿기 전에 훔쳐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별할때도 안울었고 그뒤로 두달동안이나 정상인처럼 살았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흐윽,흑...... 울음소리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결국 선호는 눈물을 닦는걸 포기했다. 식탁유리에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져 티켓을 적셨다. 진짜, 끝까지, 너무 치사하다 라관린.



유선호는 다짐했다. 가야겠다고. 꼭 가서 그새끼는 얼마나 잘지내는지 봐야겠다고. 뭐... 그렇지도 않겠지만. 




마시멜로가 부푸는게 두려워서 I


보라보라





그래, 따지고 보면 둘은 그렇게 대단한 사이도 아니었다. 같은 과 CC도 아니었고, 겨우 교양하나 같이 들은거 뿐이고. 그래도 그 어쩌다라는게 선호는 자꾸 맘에 걸렸다. 우연이 자꾸 겹치면 정말 필연이 되는거였나? 선호는 관린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점심을 먹으려 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툭툭, 어깨를 치는 손에 돌아보니 언듯 엇비슷한 키의 남자가 서있었던 무려 첫학기의 금요일날. 관린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선호 옆의 계시판을 가리켰다. 


"이거 어디에요?"


자세히 보니 밴드 동아리의 홍보 포스터였다. 위치는 같은 건물내 3층에 위치한 방이었다. 아 여기요. 이거 그냥 3층 오른쪽 복도에 있는 강의실 옆에... 까지 말하니 이내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내긴가보네. 그냥 제가 지금 가르쳐드릴게요. 저 따라오세요. 그러자 남자가 아까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어, 방금 좀 설리? 닮았었지. 혼자 그렇게 곱씹으며 아뇨, 별말을요, 하고 대답했다.



근데 혹시 새내기에요? 선호가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대만에서 교환학생 왔어요. 아까와는 다르게 입꼬리만 당겨 웃으며 남자가 말했다. 갑자기 말을 걸자 좀 긴장한 눈치였다. 어, 진짜? 와, 근데 왜 와도 우리학교를 와요 그렇게 좋지도 않은데. 아 아닌가? 전공따라 다르겠넹. 뭐 하러 왔어요?  아, 이름도 모르지. 이름은 뭐에요? 저는 유선호에영. 당황한 얼굴로 남자는 선호를 쳐다보았다. 혹시 이런거 싫어하는 타입인가... 어색한건 못참아서 조금 말을 많이 해버렸다. 그런 선호의 생각을 읽은듯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라이관린이에요. "


라이관린, 관린, 린린, 그리고 다시 라이관린이 될때까지. 선호는 사실 느끼고있었다. 관린이 이름을 말하는 순간 요란하게 울리던 심장의 빨간불을. 


어, 오, 왜 왜 그러지 왜 뭐지 왜  


마주본 두 눈의 예쁜 깊이를 자각한후엔 심장이 조금 미여왔다.  쿵쿵대는 심장이 관린에게까지 닿을까 걱정스러워 조금 떨어져 섰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꼭 지금의 자신이 미래에서 보내는 경고메세지같았다. 이제부터 불가항력의 속도로 빠져들게될 애야, 조심....



물론, 그뒤는 전혀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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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점심 선호는 관린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찾아냈다. 알고보니 [잘생긴 대만 유학생] 같은 느낌으로 일주일만에 꽤나 유명인사가 된듯 했다. 팔로우 완료! 디엠은 보낼까 말까 하다 결국 안보냈다. 혹시 우리 관리니가 무서워하면 오또케! 라 하자 앞에서 밥을 먹던 대휘와 진영이 젓가락을 놓았다. 하여튼 쟤는 누구한테 꽂히면 답이 없어요. 진영은 못볼꼴을 봤다는듯 다시 라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일단 관린을 다시 만나는게 중요했다. 



관린의 인스타에는 별 사진이 없었다. 팔로잉 목록엔 처음 들어보는 밴드나 아티스트 이름이 가득했다. 대휘에게 보여주니 자기도 좋아하는 밴드들이라며 갑자기 관린을 좀 만나보고싶다 졸랐다.아 앙돼. 나도 한번바께 못봤거든? 아프지않게 대휘의 무릎을 쳤다. 보고있던 진영은 아까부터 이해가 안된다는듯 선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건데?



아 그니까아... 키도 크고 잘생기고 짱짱 멋있어. 친해지고싶어. 그때의 선호는 마냥 다른 형들, 그러니까 민현이형이나 민현이형이나 민현이형같이 동경하고 멋있다는 마음인줄 알았다. 이형 저형 잘 따라다니던 선호라 대휘도, 진영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거같았다. 대휘가 이거좀 입에물고 그만좀 쫑알거리라고 사준 자바칩 프라푸치노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선호는 빨리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빨리는 근데 좀... 선호는 무심코 들어선 강의실에서 바로 백스텝을 밟았다. 분명 그사람이었지?  그랬다. 그게 관린이 아니었으면 선호는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강의실에 발을 내딛었다. 옆에 앉을까? 앉아야 하나? 고민하던사이 진짜 영화같이 눈이 마주쳤다. 관린의 눈이 티나지않게 커지는게 보였다. 어색하지 않게 옆자리에 앉을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반엔 왜인지 핵인싸 유선호가 친구는 고사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정확히 그날 아침에 만난 관린을 제외하곤. 



서노도 이수업 들어요? 관린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한 그때처럼 크게 미소를 지었다. 네! 근데 저 말 편하게 해도 되요? 관린씨 2학년이라면서요! 말은 하면서도 혹시나 뜨뜨미지근한 표정을 지을까 겁이 났다. 관린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2학년이야? 하고 되물었다. 아니, 왠지 새내기인거같았어 서노. 그땐 그말이 마냥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장난인줄만 알았건만, 사귀고 나서도 관린은 선호에게 귀엽다고, 병아리같다고 자꾸만 놀려댔다. 그렇네, 라이관린은 그런 사람이었네. 처음부터 그 말은 진심이었나보다, 어쩌면 그는 배려와 진심과 호의와 여럿의 경계선을 선호 자신이 구분해내기엔 너무 미묘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서, 지금의 선호는 약간 울적해졌다. 





관린이 다른 형들과 다르고, 사실은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감정보다도 더 특별하고 몽글하단걸 알게된건 조금 더 멀리의 일이였다. 그때까지의 선호는, 이 온통 말랑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금방이라도 터질꺼같이 자꾸만, 관린을 볼때마다 오작동이 일어날것처럼 몸이 빳빳해졌다. 뒷목에 힘이 들어가고, 곁눈질로 수업 내내 옆 얼굴을 훔쳐보게되어도, 그저 관린이 너무 잘생겨서,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란게 멋있어서 그런줄만 알았었다. 애초에 남자든 누구든 특별한 감정을 가져본적이 없는 선호에게 관린은 헷갈릴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혼자 생긴 의미는 점점 또혼자 부피를 늘려갔다. 자신도 모르게 커진 이 감정이, 끝에는 펑 터져버릴것을 알았다면...




티켓을 손에 그러쥐었다. 당장 공연은 다음주였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반드시, 끈적하고 썩어빠진 맘을 치워야한다. 안그러면, 또, 선호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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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냐흠냐 하고싶은거 했다 관릔의 베이스는 너무 욕심이고 검은욕망...아닙니다